극단 피악의 인문학적 성찰 시리즈 음악극 <백치> 후기(feat. 서강대 메리홀)
집 근처인 서강대 메리홀에서 공연이 있어서 오랜만에 장장 3시간이나 되는 깊이 있는 공연을 보았습니다.
짧고 가벼운 유튜브 영상에 길들여져 있다가 세계적인 문호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음악극으로 만나니 문학에 탐닉하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백치> 공연이 열린 서강대학교 메리홀은 서강대 정문에서 왼쪽 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있습니다.
클래식한 공연장을 보는 듯한 웅장한 느낌의 서강대 메리홀.
규모는 작지만, 오래된 건축 양식이 멋졌습니다.
메리홀은 1970년 한국 대학 최초로 개관한 공연장이며, 3층 높이의 무대 공간으로 당시 대학은 물론 우리나라 공연계에서도 보기 드문 최고 수준의 전문공연장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700석 규모였던 공연장은 2004년 리모델링으로 현재의 400석 수준으로 변경되었으며, 대극장은 1층과 2층, 발코니석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메리홀 이용시 주차할인이 가능했어요.
직접 QR코드에 접속하거나 비치된 태블릿을 이용해 사전에 할인권을 선택한 후 출차해야 하는 시스템입니다.
백치
- 공연 기간: 2024.11.27(수)~2024.12.08(일)
- 공연 일시: 화~금 19:00, 토 15:00, 19:00, 일 15:00
- 공연 시간: 180분(인터미션 10분 포함)
- 관람 연령: 만 13세 이상
- 티켓 가격: VIP석 8만원, R석 6만원, S석 3만5원, 시야제한석 2만원
- 티켓 예매: 인터파크 단독 예매(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4015897)
<백치>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백치>를 음악극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선보이는 극단 피악과 나진환 연출가는 <죄와벌>, <악령>,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어 <백치>까지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소설을 무대에 올리며, 세계적인 고전문학과 연극의 만남을 꾀합니다.
단기간 공연이라 단독 캐스팅입니다.
아나스타샤 크세노폰토바(나스타샤 역), 한윤춘(미쉬킨 공작), 박근수(예빤친, 레베제프 역), 이강준(로고진 역), 장다경(아글라야 역)이 주요 배역을 맡았습니다.
장르가 연극도 아니고, 뮤지컬도 아니고 음악극이라 연기파 연극배우와 뮤지컬배우가 섞여 있는 게 이색적입니다.
공연장 규모에 비해 무대 공간이 생각보다 넓었어요.
저는 S석이라 2층에서 봤는데, 2층에서도 충분히 배우들의 섬세한 표정 연기까지 다 보였습니다.
특히 S석 맨 앞줄인 K열은 발도 주욱 펼 수 있어 R석 뒷자리보다 차라리 나을 수도 있습니다.
좌석은 그리 편하지 않았어요.
공연 시간이 인터미션 포함해 장장 3시간이라 너무 힘들었습니다.
세종예술회관, 국립극장 이런 고급 좌석과 절대 비교하면 안됩니다.
작품 내용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상당히 심오하고 어렵습니다.
만 13세 이상 연령가지만, 어느 정도 인문학적 소양과 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에요.
당시 러시아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이 현재 우리의 현실과 많이 다른 것을 감안하고 봐야 합니다.
다만, 배우들의 완벽한 연기와 노래와 무용이 결합된 실험, 파격적인 무대 연출 등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띄는 배우들의 분장, 의상, 무대 등은 참 좋았습니다.
특히 미쉬칸 공작 역의 한윤춘 배우가 단연 돋보입니다.
그 동안 <단테 신곡>의 단테, <햄릿, 걷는 인간>의 햄릿,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반 역 등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그의 경력이 증명하듯 미쉬칸 공작의 심오한 내면 연기도 압도적입니다.
뮤지컬 배우 이강준과 장다경은 중간 중간 본인의 노래 실력을 뽐내며 극의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합니다.
국립 스타니스랍스키 엘렉트로 극장 소속 배우 아나스타샤 크세노폰토바의 출연은 양날의 검 같았어요.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백치>의 원작 분위기를 살리는 느낌은 있으나 나머지 한국배우들과 조화롭지는 않았습니다.
아예 오리지널 공연이면 모르겠는데 자막을 중간중간 봐야 하는 것도 몰입도를 떨어뜨렸어요.
여튼 오랜만에 정극을 봐서 감회가 새로웠으며, 도스토옙스키 작품 또는 고전문학의 감성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볼 만한 공연입니다.
초반 공연이라 음향과 자막에서 미스가 좀 있긴 했지만, 배우들만은 완벽했습니다.
이렇게 긴 호흡의 공연을 단 하나의 실수도 없이 이끌어간 배우들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